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문단 편집) === 모차르트와 프리메이슨의 관계 ===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 18세기에는 프리메이슨은 현재의 인식과는 다른, 귀족 중심의 지적인 엘리트 사교문화의 한 형태였다.] 회원이었고, 자신이 속한 지부의 Master Mason이 되기까지 헌신적인 프리메이슨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이든도 모차르트의 권유로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였으나, 도중에 탈퇴하였다.] 말년에 모차르트의 경제 상황이 넉넉지 않았을 때 그는 프리메이슨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중 프리메이슨 지부의 재무 담당이었던 미하엘 후흐 베르크에게 상당히 많은 신세를 졌다.] 모차르트 사후 모차르트의 가족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또한 프리메이슨은 모차르트의 음악 활동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의 비밀을 [[마술피리]]를 통해 누설하여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당시 프리메이슨 서약에는 "나는 정화시키며 비밀을 지킨다. 어기면 내 목을 자르거나 혀를 내 머리에서 뽑는다."라는 조항이 있긴 하였다. 그러나 마술피리의 총책임자인 에마누엘 쉬카네더도 프리메이슨 회원이었고, 그는 1812년에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뜬다. 그래서 모차르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거짓으로 보인다. [[프리메이슨]] 항목을 봐도 알 수 있지만 18세기 당시든 21세기 현재든 실제로 존재한 조직으로써의 [[프리메이슨]]은 세계정부 운운하는 음모론 떡밥과는 전혀 다른, 그냥 세계구급(모차르트 당시에는 전 유럽급) 규모의 신사들을 위한 사교 클럽이다. 굳이 특징을 찾아보자면 [[귀족]]계층의 [[살롱]]을 중심으로 하던 이전 시대의 사교계에 비해 귀족은 아닌 신사계층(재산, 또는 학식을 갖춘 상위 시민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것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젊은 나이부터 고압적이고 오만한 귀족들과 잦은 충돌을 벌여왔던 모차르트가 '대등한 관계'로 교류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오스트리아의 프리메이슨 입장에서도 모차르트와 같이 대단한 명성을 가진 유력인사의 가입을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즉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는 것은 그냥 "모차르트는 당대 오스트리아(빈)의 지식인, 교양인 및 재산가들과 자주 교류했다"의 한가지 형태일 뿐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프리메이슨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 역시 프리메이슨과 같은 사교조직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상부상조]]였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사업가나 기술자, 법률가등의 단원이라면 클럽 내에서 얻은 인맥을 통해 서로 직업, 사업상의 도움을 주고받을 것이고, 명성은 있지만 돈은 잘 못 버는 학자나 예술가 단원이 있다면 재산가 단원들이 그들에게 경제적 보조를 해 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가 곡을 하나 쓰면서 그동안 자신에게 경제적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삼아 '이 곡은 미하엘 후흐 베르크의 도움으로 쓰여졌다' 라고 한마디 달아놓으면 이는 재산가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명예로운 일이 되는 것. 더 나아가 클럽 활동이 음악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 역시, 프리메이슨 내에서는 당대의 다른 예술가나 지식인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으니 그 관계에서 긍정적인 피드백 역시 충분히 얻을 수 있었던 것. 당시 프리메이슨 서약에 "나는 정화시키며 비밀을 지킨다. 어기면 내 목을 자르거나 혀를 내 머리에서 뽑는다."와 같은 조항이 있다는 것 역시, 괜히 음모론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교 활동을 하면서 교류하다 보면 당연히 서로에 대해 이것저것 알게 될 것인데, 그런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떠들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프리메이슨에 신비주의적 면모가 상당히 섞여 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는 시대 배경상 현대인의 기준에서 신비주의적, 오컬트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당대 기준으로는 합리적 지식의 일부였기에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마술피리와 관련된 프리메이슨 음모론 역시, 프리메이슨에 대한 음모론 떡밥을 이미 줏어먹은 사람들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들어낸 새로운 음모론일 뿐이지 딱히 근거가 있는 주장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모차르트는 엄연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평생을 살았으며, 딱히 오컬트의 신봉자는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아직 교회의 프리메이슨 금지령이 오스트리아까지 미치기 전이었기 때문에, 빈의 사교계 일원들은 자동파문을 걱정할 필요 없이 프리메이슨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모차르트가 죽은 지 3년 후인 1794년, 프리메이슨 결사는 오스트리아에서 결국 사라지고 만다.[* [[요제프 2세]]가 프리메이슨이 필요 이상으로 확장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내놓은 '프리메이슨 칙령'에 의해 단체의 힘과 결속력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쇠퇴해오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